[공간과 사람]비 내리는 쓰레기장에서 찾은 것은 ‘일기장’이 아니었습니다
| 사진: Unsplash의reza shayestehpour |
오래전, 정리 일을 막 시작했을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날의 풍경이 조용히 떠오릅니다.
1. 50리터 봉투 스무 개에 담긴 ‘새 물건’들
딸의 의뢰로 부모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결혼을 앞둔 딸은 예비신랑을 집으로 데려오기 어렵다며, 정리를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주방은 이미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날 제가 맡은 일은 물건을 분류하는 일이 아니라, 그대로 밖으로 내놓는 ‘배출’ 작업이었습니다.
봉투에 담기는 물건들을 보며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냄비, 그릇, 조리 도구들… 대부분 스티커도 떼지 않은 새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새 물건만 50리터 봉투로 스무 개 가까이 되었습니다.
멀쩡한 물건들이 비를 맞으며 쌓여가는 모습을, 저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초보였던 제게는, 그 장면이 조금 두렵게 느껴질 만큼 낯설고 무거웠습니다.
2. 가족들의 말, 그리고 엄마의 조용한 이동
더 마음이 쓰였던 건 그 집의 공기였습니다.
딸을 포함한 가족들은 엄마를 향해 “왜 이렇게 모아두느냐”, “병적인 것 아니냐”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거의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물건 몇 개를 안방으로 옮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날 정리하지 않기로 약속된 유일한 공간, 안방.
엄마에게는 그곳이 마지막으로 숨을 수 있는 자리처럼 보였습니다.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자신의 물건 몇 개를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3. 비를 맞으며 찾았던 ‘가장 소중한 것’
정리 중간, 엄마가 제게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내 일기장… 그것도 버렸니?”
손댄 적 없는 물건이었지만, 엄마는 갑자기 불안해지신 듯했습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밖으로 뛰어나가셨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쓰레기봉투를 찢으며 한참을 뒤졌습니다.
젖은 종이, 젖은 상자, 젖은 봉투들 사이에서요.
결국 일기장은 안방 서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잃어버린 건 일기장이 아니라,
가족들 앞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이었다는 걸요.
4. 물건의 자리는 있어도, 엄마의 자리는 없었던 집
그날 그 집에는
새 물건들이 들어갈 주방 찬장도 생겼고,
딸이 예비신랑을 맞이할 거실 공간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곳,
마음이 무너진 엄마가 편히 서 있을 자리는 없었습니다.
가족들의 날 선 말 속에서,
엄마는 평생 써온 일기장조차 지켜내지 못할 만큼 작아져 계셨던 겁니다.
저는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날의 엄마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어떤 공간을 정리하든,
물건보다 사람을 먼저 보겠다고.
주인에게 상처를 주며 얻어낸 깔끔한 공간은,
결코 아늑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건네는 질문
정리를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이게 맞는 걸까” 하고 멈춰 서게 됩니다.
- 혹시 지금, 누군가를 위해 대신 정리를 고민하고 계신가요?
- 그 물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묻고 계신가요?
- 오늘 비워야 할 것은 물건일까요, 아니면 서두름일까요?
👉 댓글로 당신의 정리 이야기, 혹은 망설임을 남겨주세요.
정리는 혼자서보다, 나누며 시작할 때 오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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